내가 의사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은둔자가 되었을 것 같다.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나만의 공간을 찾았을 것 같다.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며 내가 사랑하는 글을 쓰며 혼자 지냈을 것 같다.
생계에 꼭 필요한 일만 하며 나머지는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달리기로 내 삶은 흘러갔을 것 같다.
의사가 되니, 좋으나 싫으나 매일 같은 시각에 진료실에 가야 한다.
출근하여 진료실에서 진료를 준비하다 보면 진료 시작 시간인 8시 30분 보다 일찍 환자분은 와 계신다.
대개 아침 7시부터 환자 분들은 오신다.
진료 시작 시간이 아니어도 일찍 오신 환자분들을 진료한다.
숨소리가 느껴지는 거리에 앉아서 나에게 한 달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 주신다.
혈압이 어떠며 혈당이 어떤지, 요즘은 식사를 어떻게 하는지, 요 며칠 새로 아픈 곳은 어딘지 이야기해 주신다.
만난 지 오 년이 넘어가니, 집안 일도 이야기해 주신다. 이번에 따님이 결혼을 해서 결혼식 전날까지는 꼭 기침이 나아야 한다고 하신다.
김장철만 되면 김장을 해서 주시는 분도 계시며 닭이 갓 낳은 청란을 주시는 분도 계시다.
요즘 핼쑥해 보인다며 건강을 챙기라며 나를 걱정해 주시는 분도 계신다.
어릴 때부터 친한 오랜 친구라 해도 일 년에 한번 보기 힘들다.
하지만 환자 분들은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열두 번 만난다.
친구보다 더 자주 만난다.
환자분들은 아실까?
내가 요즘 환자분들에게 정이 들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기에.
그저 조금 더 따스하게 바라보고 조금 더 부드럽게 진찰하려 애쓸 뿐이다.
진료 기록을 하다가 잠깐 눈을 마주치려고 애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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