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환자분이 오셨다
처음 뵌지 3년째인 분.
의자에 앉자마자 혈당을 재었다.
환자분은 손을 주저하다가 내밀었다.
식후 2시간 257
점심은 뭐 드셨나요?
"라면을 먹어서... "
밀가루는 혈당을 빠르게 올립니다.
요즘 운동은 하시나요?
"....."
이렇게 당이 조절이 안되면 인슐린 맞으셔야 해요.
대기환자 9분. 시간이 없다.
차트기록을 하고 약을 처방하고 인사를 하려는 순간,
환자분 손이 보였다.
기름때가 묻은 손.
오른손 집게 손가락은 반만 남아 있었다.
공장에서 기계에 손가락을 잃었다고 했었지.
그날 따라 왜 갑자기 손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혈당을 알려주는 손. 뭘 먹었는지 알려주는 손. 나에게 야단 맞을 빌미를 주는 손.
기름때가 손가락 주름 마다 있어 까만 줄이 보였지만, 손톱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지저분한 손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손이였다.
그제서야 낡은 작업점퍼와 땀에 절은 머리카락, 목덜미에 파스, 두꺼운 안경도 오늘은 보였다.
다시 보니 안경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생각보다 젊었다.
불쌍한 모습이 아니라 다만 지치고 피곤할 뿐이다.
내가 만일 그의 어린 시절이라는 속옷을 입고, 그의 가난이라는 신발을 신고
그의 부모님을 대신 업고 그의 어린 자녀를 안고,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말들과 그의 가슴 속에 단단하게 심어진 감정을 끌고 달린다면,
그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들었을 것이며,
힘내라는 응원을 얼마나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전지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채워져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건전지를 가지고
그처럼 달릴 수 있을까?
한달마다 야단 맞을 줄 알면서도,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알면서도
박복하고 쫓기는 삶에서, 그래도 라면이 쉽기에
라면을 먹고 그처럼 병원에 올 수 있을까?
진료차트에 이렇게 쓰고 싶었다.
오늘 영웅이 왔다고.
그와 인터뷰를 했다고.
2020-03-12 목요일
-------------
상단그림 : 귀스타브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1849)
단상
영웅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