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이란 무엇인가?
현존이란 현재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를 알아차리고 현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것과 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는 것이다. 현존이란 현재를 알아차리고 현재와 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는 것이다.
현존은 왜 중요한가?
현존은 꽃을 피우는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꽃은 시간 속에서 피지 않는다. 시간 밖에서, 영원한 현재에서 피울 수 있다. 시간이 없는 무한한 공간 내에서 상처는 아물고 회복되며 문제는 해결된다. 시간이 멈춘 이곳에서 마음은 고요하고 감사와 사랑이 흘러나온다. 시간 속에서 느끼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이 감정은 불행을 피했다는 안도감이다. 이야기 속에서 느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좋은 거래를 했다는 만족감이다.
현존은 감사가 우러나오는 배경이 된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선지이며 씨앗이 싹 틔울 수 있는 비옥한 땅이다. 신을 초청하는 레드카펫이다. 현존의 상태에서는 자신과 주변에 생생하게 깨어있다. 하늘은 더욱 푸르게 보이고 꽃의 향은 더 진해진다. 물소리는 더 청아하다. 마음은 고요하다. 어떤 재잘거림도 없고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듯하지만, 모든 것이 조화롭다. 시간은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듯하다. 현존을 한번이라도 경험한다면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은총 그 자체이며 너무나 황홀하고 황송하기까지 하다. 현존 상태에서 벗아나게 되면 그 상태를 다시 갈구하게 된다.
현재란 무엇일까?
현재의 동의어는 진리, 하느님, 신(神), 천국(天國), 완벽함, 도(道), 진아(眞我) 등이 있다. 전체, 무한 혹은 무(無), 온전함, 완전함, 나와 네가 구분 없는 상태, 모두 연결된 상태, 모두가 모두의 원인이 되는 상태를 포함한다. 현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신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신이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신이 어떤 순간은 함께 하고 그 외 다른 순간은 함께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 년에 특정한 날을 정해두고 그때만 함께 하는 것일까?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만날 수 있을까?
높은 지위를 갖추었을 때만 함께 하실까?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어느 정도 이상의 부를 쌓아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다.
신은 언제나, 항상, 어느 곳에서나, 내가 어떤 조건이든지 나와 함께 한다. 바로 지금도 나와 함께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지금 어떤 감정이 들까? 경이로움과 감사함이다. 신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와 사물과 공간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진면목을 본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판단 속에서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짝이면서 지금 여기에 있음을 알아차림을 말한다. 꽃 한 송이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꽃 한 송이는 내 마음의 한 면을 비춘다. 나의 사랑을 드러낸다. 꽃 한 송이를 나에게서 완전하게 분리할 수 있을까? 꽃을 꺾어서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려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여기에 '있음'을 바라본다면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나도 지금 여기에 있고 꽃도 지금 여기에 있다. 꽃과 꽃을 바라보는 이는 명확하게 분리할 수 없다. 모두 하나의 의식 속에 있다.
빈 공간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가능성과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빈 공간이 없다면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없다. 불가능하다. 페미 박사는 빈 공간을 바라보면 뇌파가 느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체와 물체 사이를 상상하거나, 무한의 공간을 상상하면 뇌파가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변하는 것을 알아내었다[1]. 빈 공간을 바라보거나 상상하면 우리는 신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를 인식하게 된다. 신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모든 뇌세포는 동조하여 화음을 내게 된다.
무엇이 현재의 반대말일까?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반대일까? 아니다. 현재인 척하는 '이야기'가 반대이다. 꽃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무엇일까? 쓰레기, 오물일까? 아니다. 꽃처럼 포장한 조화(造花, 가짜 꽃)가 가장 거리가 멀다. 우리는 현재를 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지루해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안다. 나를 심하게 몰아붙이는 직장 상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나를 은근히 공격하는 직장 동료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뜻이 잘 맞아 한 정치인을 같이 비난해 주는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의 의미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할 삶의 한 부분이다. 오늘 힘들지만 지금 무언가 해 놓아야 미래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 이 순간을 어느 정도 충분히 희생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 순간은 내가 바라는 어떤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그 그림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은 친구이고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적이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사실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 다른 의미의 잠 속으로 빠져든다. 꽃을 만드는 마음은 자신이 꾸며내는 이야기가 실제임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원하는 삶을 위해서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모습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자신만의 여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모험이든, 여행이든, 항해이든,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여정을 떠나서 적을 물리치고 친구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이 어떤 일에 대한 희생자인 듯하고, 부당한 일을 겪은 것 같고, 자신이 버려진 듯하고, 이 순간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 이야기가 현재의 반대말이다. 이 순간은 온전하지 못하니 통제해야 한다고 재잘거리는 이야기가 현재의 반대말이다. 과거, 미래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과거, 미래가 현재의 반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또한 대조를 먹고 자란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향하는 시간의 축을 뼈대로 특정한 장소를 배경으로 반대되는 역할들을 교대로 엮여 살을 붙인다. 악인(惡人)과 선인(善人), 가해자와 피해자, 낙오자와 구원자, 환자와 치유자, 믿는 자와 배신자들이 살붙이기에 많이 사용되는 재료들이다. 우리는 곧잘 이야기에 빠져 있다. 조금 전에 혹은 십 년 전에 서운했던 일들, 화났던 일들, 두려웠던 일들, 질투했던 일들, 수치스러웠던 일들이 순간순간 떠오른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감정이 엉겨 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희생자, 피해자, 선인이었다면 엉겨 있는 감정은 분노 혹은 두려움이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가해자, 악인, 배신자였다면 엉겨 있는 감정은 죄책감, 수치심이다. 마음은 현재 상황을 '그림'으로 해석해서 예전에 불편했던 어떤 상황을 떠올리도록 한다. 이야기는 태엽 감긴 장난감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예전에 느꼈던 그 감정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에 빠져 있다면 현재에 있지 못한다. 또한 그 감정들이 시야를 왜곡해서 지금 이 순간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없다.
현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현존은 자신을 다그쳐서 얻을 수 없다. '현존하겠다!' 선언하고 결심해도 이룰 수 없다. 현존하는 척 해도 다다를 수 없다. 남을 속이기 위해 현존한 척할 수는 있지만, 공허한 가짜 꽃이다. 지금껏 나도 모르게 현존했을 때는 현존하기로 결심해서도 아니었고, 현존한 척을 해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현재에 존재할 때 현존은 이루어진다. 알아차리고 하나가 되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다. 같은 진동수로 진동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재를 알아차리고 현재와 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면 나는 사라지고 현재만 남는다.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하나인 척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오로지, 그것과 같은 진동수를 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재는 어떤 진동수를 가지고 있을까? 현재는 진리, 하느님, 신, 천국, 완벽함, 도(道), 진아와 같다. 이들은 현재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들의 진동수는 매우 높다. 이들과 같은 진동수는 감사, 사랑이다. 즉 현재를 알아차리고 이에 감사하고 사랑할 때 같은 진동수를 내기 시작한다.
현재를 알아차리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현재를 직접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가 아닌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즉, 이야기를 알아차려서 현재를 드러나게 한다. 어둠을 알아차려서 빛이 드러나게 한다. 현재를 알아차리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현재와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현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현재와 같은 진동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현재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와 다른 진동수를 낸다는 것이다. '원망'과 '통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감사하고 있는 그대로 내맡기는가 혹은 원망하고 통제하려고 하는가가 하나 됨을 결정한다.
현재를 직접 알아차리는 것은 신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은 언제일까? 내가 특정한 시간에 있을 수 있는가? 시계가 1시를 가리킨다고 해서 지금 1시인가? 이미 1시는 지났다. 모든 물리적 시간은 시작하면서 끝난다. 여기는 어디일까? 이 장소는 지도상의 어디인가? 지구도 이 태양계도, 이 은하계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순간과 이곳은 내가 아는 곳인가? 눈송이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것처럼 이 순간은 이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새로운 순간이고 장소이다. 깨어있음은 내가 지금 이 시각과 장소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온전하고 완벽하며 새로운 창조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현존은 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신은 이야기 바깥에 있으며 생각 밖에 있으며 시간 밖에 있다. 공간, 침묵은 무형이며 신에 가깝다. 이 순간 나무가 아닌 숲 전체를 보려 해도 신을 보려는 것과 유사한 효과가 있다.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려고 의식하는 것도 신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신은 모든 것이며 전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형의 공간, 예를 들어 두 눈 사이의 공간을 상상하거나, 무(無), 무한을 상상하면 뇌파는 느려지고 일관된다. 신을 의식한다는 것은 무형의 공간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침묵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신의 특성인 무형, 무한함, 무, 침묵에 주목하면 뇌파는 느려지며 일관된다. 베파타에서 알파파로 넘어가고 무형을 의식하는 힘이 충분하면 세타파로 넘어간다. 모든 소리의 배경인 침묵을 의식해도 뇌파는 느려지고 현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에 이 순간 한 사물만 의식하지 않고 전체를 온전히 의식하려 한다면 역시 또 다른 존재 상태로 넘어간다. 나무만 본다면 이야기 속에 매몰되지만, 숲을 본다면 이야기 밖으로 솟아나온다.
신은 내가 생각하는 '나'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벗어나게 되면 만나게 된다. 여기에 있으라는 것은 '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나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나를 벗어나려고 하면 실패한다. 오히려 나라고 여기는 것을 바라보는 나를 찾아보자. 지금 책을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켄 윌버[2]가 탁월하게 통찰하였다. 책을 읽다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나와 책이 있다. 나와 책을 바라보는 이는 어디에 있을까? 거울 속 풍경 어디에도 '그 풍경을 보는 자'는 없다. 매우 오묘한 순간이다. 바라보는 행위만 있을 뿐 나와 책을 보는 이는 찾을 수 없다. 어느새 나에게서 벗어나 있다. 꽃을 바라볼 때 꽃을 나에게서 정확하게 도려낼 수 없다. 꽃과 꽃을 보는 나의 몸은 통째로 나의 의식 속에 어우러져 있다. 꽃과 나의 몸과 그 사이의 공간은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그 풍경 전체를 보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바라봄만이 있다.
이야기를 알아차리는 것을 살펴보자. 이야기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 과거와 미래에 있다는 것은 과거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존한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마음이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곱씹으며 되새기며 다시 한 번 내가 왜 피해자이고 상대방이 왜 가해자이며 악인임을 증명하는 단서들을 찾는 것은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이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시하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도 현존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재잘거리면 안 된다고 마음을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것도 현존이 아니다. 통제, 억압, 회피, 무시는 낮은 에너지이다. 낮은 에너지는 이야기를 강화한다. 현존하기 위해 사람으로서 할 일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제하는 것은 낮은 에너지이다. 알아차리는 것은 높은 에너지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행동은 일종의 에너지이며 크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에너지가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인간의 감정과 의식의 수준을 나누었다. 가장 부정적인 감정인 수치심과 가장 긍정적인 감정인 평화까지 숫자로 표현하였다[3]. 그에 의하면 수치심, 죄책감, 무의욕, 비탄, 공포, 욕망, 분노, 자부심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용기, 자발성, 받아들임, 사랑, 기쁨, 평화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행동을 살펴본다면 통제하고, 바꾸려 하고 고치려 하는 것은 부정적이다. 저항하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도 부정적이다. 반면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행동은 긍정적이다. 친절을 베풀고 축복하는 행동도 긍정적이다. 소망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이야기와 엉겨 있는 감정을 알아차리되 통제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이야기 밖으로 물러나게 한다. 이야기 밖으로 억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서 저절로 풀려나게 된다. 이야기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신이 하는 일이다. 그저 관찰하는 것은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틱낫한 스님은 ‘알아차림’ 자체가 붓다의 에너지라 하였다.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이야기에 엉겨 있는 감정을 무시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그대로 알아차리면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 감정을 수용하여 느끼는 것도 이야기에서 사건과 감정을 떨어뜨려 놓아서 이야기의 힘을 소멸시킨다. 한번 감정이 소멸되면 그 이야기가 떠올라도 객관적인 사실만 떠오르며 이전에 엉겼던 분노,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따라오지 않는다. 현존하기 위해 내가 몇 시에 책을 보며 밥을 먹고 있고 손가락 모양은 어떤지 등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현존이 아니다. 이 순간을 감시하는 것이지 현존이 아니다. 감시는 낮은 에너지이며 현존에 도움이 안 된다. 이야기를 떠올릴수록 내가 지금 피해자라 생각이 강해진다면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과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차이이지만 결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휘둘리지 않고 다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이야기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감사한다는 자체가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감사할 수 있다. 이야기는 나쁜 것이 아니다. 에고(ego)도 나쁜 것이 아니다. 박멸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이야기, 에고(ego) 덕분에 현존에서 멀어질 수 있었고 역설적으로 현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야기에 감사하고 이 이야기에서 악역을 맡아준 상대방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해체된다. 이야기를 내면의 아이로 생각하며 사랑을 보내도 도움이 된다. 충분히 의식적으로 살아가지 못한 어릴 때 받았던 상처로 화내는 아이, 질투하는 아이,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생겼을 수 있으며 시시때때로 이 아이들은 내면을 휘저어 놓을 수 있다. 이 아이들은 통제할 수 없다. 야단칠수록 더 울어 댄다.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울음을 그치고 이야기에서 풀려난다.
‘내가 지금 알아차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감정을 무시하고 있는가? 여기에 어떤 보물이 묻혀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깨어 있음은 나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즉 내 안의 이야기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야기를 알아차리고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에게서 풀려 나온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에 희망을 품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매 순간 현재 일어나는 것을
통찰력을 갖고 보라.
굳세게 흔들림 없이
이것을 알고 이것을 확신하라.
그러므로 부지런히, 끈질기게
매일 낮, 매일 밤을 이렇게 사는 이,
그는 지복한 하룻밤을 보내는
평화로운 성자라고 불린다.
- 붓다(석가모니:BC 6~5세기) 경전 ‘지복한 하룻밤(One Fortunate Attachment)'
현존을 목표로 사는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존하려 할수록 현존에서 멀어진다. 마치 깨달음을 추구할수록 깨달음이 멀어지는 것과 같다. 현존하려고 애쓰지 말자. 이 순간에 존재하려고, 이 순간을 영원한 현재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자. 시간을 잘게 쪼개서 찰나를 경험하려고 하지 말자. 여기에 존재하기 위해 나를 없애려고 하지 말자. 자아가 없는 척하지 말자. 현존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지옥과 천국처럼 다른 결과가 생긴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면 꽃을 만들게 된다. 그저 이야기를 알아차리자. 그저 공간을 바라보자. 이야기를 알아차려 이야기에서 놓여나고 의식적으로 신을 알아차리게 되면 현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문제와 고통은 항상 두 가지를 필요로 한다. ‘시간’과 ‘나’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축과 그 시간축을 여행하는 나 자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시간에서 벗어나고 나에게서 벗어나면 문제와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야기에서 벗어나면 영원한 현재에, 무한한 여기에 도착해 있다. 꽃은 고요함 속에서 핀다. 침묵 속에서 핀다. 꽃피우는 삶은 현재, 이 순간 고요함이 생길 때 가능하다. 고요하다는 것은 마음이 재잘거림을 멈추었다는 것이고 자신이 텅 비워졌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속에서 자신을 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과 함께 흐르면 된다. 물과 하나가 되면 자신은 비워진다. 헤엄을 치며 그 자리에 있거나 반대 방향으로 가려 한다면 자신의 주변에는 물보라가 생길 것이다. 힘을 빼고 물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흘러가면 물보라는 사라진다. 물과 하나가 된다. 고요하다는 것, 자신을 비워낸다는 것은 이 순간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비워진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고요해지려고 하면 고요해지지 않고 비우려고 하면 비워지지 않고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겨냥하면 빗나간다. 빗나감을 피하기 위해서는 감사함이 지름길이며 내맡김이 비결이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평상심이 도다.”
“그 도를 행하여 나아갈 길이 있습니까?”
“행하여 나아가려고 하면 벌써 도와는 어긋난다.”
- 조주 스님과 남전 선사의 대화
무형의 공간을 바라보거나 전체를 한꺼번에 바라보면 기존의 이야기에서 벗어난다. 어떠한 서사, 어떠한 줄거리, 어떠한 이야기가 없다면 기존의 시간 감각은 없어질 것이다. 대신 생생한 현존감이 살아나 인식은 확장될 것이다. 느려지고 일관된 의식상태에서 이야기에 휘둘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무시하지도 않으며 알아차림, 감사함, 사랑이라는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매 순간 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존하여 지복을 느낄 것이고 평화로움은 우리 가슴에 가득 차서 주변으로 흘러갈 것이다. 현존하게 되면 이 순간, 영원한 현재에서 창조할 수 있음을 알고 스스로 창조자가 됨을 알게 된다. 그럼 저절로 감사함은 더욱더 깊어진다. 신을 알아차리고 감사함을 고백하면 가슴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예(藝, ART)를 행할 배경을 얻게 되었다.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땅을 일구었고 노래를 할 수 있는 오선지를 얻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실을 갖게 되었고 춤을 출 수 있는 무대를 갖게 되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 시편 46:10,
현존은 신에게 맡기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래, 그림, 춤이다. 우리 삶이 세 가지 차원이 있는 것처럼 현존도 세 가지 차원이 있다. 노래를 부르는 상태의 현존이 있으며 그림 그리는 상태의 현존이 있으며 춤을 추는 상태의 현존이 있다. 하지만 보통 현존을 이야기할 때 노래를 부르는 상태의 현존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명상할 때는 평온해지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다시 번뇌에 휩싸이며 미래를 그릴 때는 다시 두려워한다. 우리는 몸을 지니고 욕구와 소망을 가진 존재이다. 눈을 감고만 있지 않고 눈을 뜨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눈을 뜨고 삶을 살 때에도 현존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노래, 그림, 춤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통해서 현존으로 갈 수 있다. 예(藝, ART)는 현존이라는 다이아몬드의 세 가지 면이기도 하며 현존으로 가는 문이기도 하다. 현존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막막할 수 있다. 노래 속의 현존만이 아닌 그림, 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더 실질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예(藝, ART)를 아는 것의 장점은 삶의 전분야에 걸쳐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상할 때만 현존하고 명상이 끝나게 되면 다시 삶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명상할 때와 하지 않을 때 구분이 사라지고 삶 자체가 명상이 될 수 있다. 현존은 외부와 차단하고 내부에 침잠하며 모든 욕구를 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서 생기 있게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추면서 이루어진다.
예(藝, ART)를 살펴보자.

[1] 레스 페미, 이재석 역, 오픈포커스 브레인(정신세계사, 2010). 원서는 다음과 같다. Les Fehmi, The Open-Focus Brain: Harnessing the Power of Attention to Heal Mind and Body (Trumpeter books, 2007).
[2] 켄 윌버, 김철수 역, 무경계: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정신세계사, 2012). 원서는 다음과 같다. Ken Wilber, No Boundary: Eastern and Western Approaches to Personal Growth (Shambhala, 2011).
[3] 데이비드 호킨스, 이종수 역, 의식혁명 (한문화, 1997). 원서는 다음과 같다. David R. Hawkins, Power vs. Force: The Hidden Determinants of Human Behavior (Hay house, 1995).
'꽃피움의 기술 The Art of Blossom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지혜 (2) | 2021.08.21 |
---|---|
7. 예 藝 Art (4) | 2021.08.14 |
5. 꽃피우는 삶 (8) | 2021.07.21 |
4. 꽃피움의 기술 목차 (0) | 2021.07.17 |
3. 서문 (0) | 2021.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