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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움의 기술 The Art of Blossoming

18. 안경

by doctorpresent 202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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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자유는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붓다

발견을 위한 참다운 항해는 새 땅을 찾아내는 것보다도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의의가 있다. 
-마르셀 프로스트 

지도를 보면서 여행할 때를 생각해 보자. 
지도에는 여러 선들이 있고, 선들이 만나서 면을 이룬다. 선들은 길일 수도 있고 강일 수도 있다. 면들은 밭일 수 도 있고 산일 수도 있다. 정교한 지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목적지까지 명확하게 보여 주며 우리가 가야 할 안전한 길과 피해야 할 장애물도 보여준다. 하지만 지도가 영토는 아니다. 영토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기도 한다. 땅에서 하늘까지 끊김 없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숲과 들판도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영토에는 선이 없고 면이 없다. 시냇물과 숲과 산과 들판이 어우러져 있으며 그 사이로 많은 길들이 얽혀 있다. 이러한 배경을 품고 낮과 밤이 바뀌고 있다. 영토는 실제 땅이며 이 땅에는 기하학적 기호가 없다. 지도와 영토가 다르기에 영토를 보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를 보며 한결 수월하게 여행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은 영토를 바라보면서 지도에서 보았던 나의 위치과 목적지를 알아채고 그 사이에 선들과 면들을 찾아낸다.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자연에서 지도에서 보았던 표지물을 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꽃을 피우는 삶을 위해서도 새로운 눈, 안경이 필요하다. 꽃피우는 삶을 위한 지도를 손에 넣었지만, 우리의 삶이 지도는 아니다. 지도에서는 노래와 그림, 춤이 명확하고 단순하다. 신이 곁에 있다고 하였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약속하였다.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만 그린다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언제라도 춤을 추기를 기다리는 천사들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도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당황스럽다. 삶은 어제와 그리 다른 것 같지 않다. 주변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이 여전히 많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요구하는 사람들만 있다. 정말 이곳에, 내 곁에 신이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소망을 그려도 되는 것일까? 정말 이 순간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나의 소망을 상상하려고 하지만,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능성의 장, 나의 화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꿈을 향해 가려하면 힘든 일이 나를 막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도 어렵겠다고 말을 한다. 오늘도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정말 신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일까? 나와 춤을 추기 위해 온 천사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모두 렌즈를 가지고 있다.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나 자신을 본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결정된다. 여러 렌즈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렌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은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서 은총을 내려주고 계신다.’
또 하나는 ‘나는 조건에 관계없이 사랑스럽다.’이다. 

이 두 가지 렌즈를 가지고 있다면 항상 천국에 살 것이다. 질병과 사고와 갈등과 불행의 가장 근본 원인은 두 가지 렌즈 때문이다. 

하나는 ‘나는 신에게 버림받았다.’
또 하나는 ‘나는 어떤 조건이 부족해 사랑스럽지 않다.’이다. 

이 두 가지 렌즈로 왜곡된 세상을 본다면 온갖 문제들이 생긴다. 꽃피움의 삶을 위해서는 훌륭한 안경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는 신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알아차린다.
그림을 그릴 때는 가능성의 장을 알아차린다.
춤을 출 때는 춤을 추기 위해 찾아온 천사들을 알아차린다. 
꽃을 피우는 삶에서 자주 마주치는 장애물을 알아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하다.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안경이 필요하며 안경은 이전과 다른 초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도와준다. 마치 매직아이처럼 같은 풍경을 보되 초점을 달리해서 숨어있는 표지들을 볼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노래의 차원부터 살펴보자. 신은 삶과 동의어이다. 현재와 같은 말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이며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 지성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고 세포분열을 일으키고 수많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나의 이성적인 논리를 이해하고 감정을 알아챌 수 있는 지성이기도 한다. 수많은 기적과 동시성을 일으키는 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신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신이 너무 작아서가 아니다. 신이 어디에 숨어 있어서가 아니다. 너무나 크고 명백하기 때문에 오히려 알아채기 힘들다. 바로 나를 둘러싸는 삼라만상 자체가 모두 신이다. 신은 특정한 형상이 없으며 매 순간 같은 모습인 적이 없기에 알아채기가 힘들다. 
신을 알아차리는 데는 연습이 필요하다. 
세가지 방법이 도움이 된다. 
하나는 공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몸의 내부에 있는 공간을 의식하거나 사물들 사이의 공간, 사물을 둘러싸는 공간, 모든 사물을 둘러싸는 무한한 공간을 알아차리는 것 모두 효과가 있다. 공간은 신과 유사한 속성이 있다. 일정한 형상이 없다. 공간을 의식하면 뇌는 휴식한다. 뇌파는 일정해지고 느려지기 시작한다. 또 하나는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만물과 그 사이 공간들 모두가 신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방식이다. 좁은 주의가 아닌 넒은 주의로 전체를 보면 전체는 시시각각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매번 새롭다. 따라서 대상화 할 수 없고 뇌는 조용해진다. 노을이 지는 들판에 앉아서 멍하게 전체를 바라보거나 강가에서 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자신을 잊고 인식이 열리는 경우가 바로 그때이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알아채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은 나 자신이 일으킬 수도 있지만 나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있다. 나의 무의식은 몸의 지성과 같은 말이고 신이란 의미기도 하다. 숨에 개입하지 않고 들숨과 날숨을 바라보는 것은 신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무심하게 바라보듯이 호흡을 바라본다면 명상 상태로 들어갈 것이다. 해안가에 파도가 밀려들어오고 쓸려나가듯, 호흡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신이 나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숨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면 감사함이 흘러나올 것이다.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 어느 방법을 통해서든 이 순간이 적과 동료에 둘러싸인 전쟁터가 아니며, 욕망과 증오가 끓는 드라마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투쟁의 상태에서 휴식의 상태로 들어가면 같은 풍경을 바라보아도 전혀 다른 대응을 하게 된다. 투쟁의 상태에서는 홀로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생존을 위해 털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휴식의 상태에서는 나를 감싸고 있는 신과 함께 은총이라는 햇볕을 쬐며 관조하게 된다. 신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보아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힘들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신은 내 곁에 있을까?’
질문을 하고 고요함과 함께 기다린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이 당연히 있음을 알아채기 시작하고 노래하는 상태로 접어든다. 
그림의 차원에서는 명상 상태가 조금 더 깊어져야 한다. 뇌파는 좀 더 느려지고 일관되어야 한다. 따로 시간을 내어 충분히 공간, 숲 전체, 호흡을 지속적으로 알아채고 높은 에너지인 감사와 사랑을 선택한다면 어느새 작은 나는 큰 나와 동일한 진동수로 진동하면서 큰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작은 나는 투명해져서 어느새 사라질 것이다. 이를 ‘자신을 비웠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를 큰 자아에 맡겨버린 상태이다. 그 상태에는 시간을 넘어서고 몸을 넘어선 상태이며 가능성의 장에 도착한 상태이다. 가능성의 장은 모든 가능성이 있는 양자 수프라고 하기도 한다. 자신만의 화실에 도착한 것이다. 이 곳에서 상상한 그림은 화실에 걸리게 되고 우주는 이 그림을 이루기로 결정한다. 매일 일정한 시간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해야 한다. 매일 되도록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의식을 하듯이 화실에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의 두려움을 그리게 되고, 다른 사람이 주입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나만이 화실에 들어가야 한다. 도둑이 몰래 들어가 그림을 그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자신을 새롭게 선택하는 일이고 창조하는 일이다. 이 때 조심할 점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하는 순간 그 반대가 되는 배경도 자동적으로 창조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선택한다면, 그 순간 자동적으로 ‘불의한 사람들’을 창조하게 된다. 불의한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정의로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선생’으로 창조한다면 ‘제자’들을 창조하게 된다. 즉, 무지한 사람들을 창조한다. ‘구원자’가 되려면 ‘낙오자’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모른다면, 창조를 의식적으로 하면서도 투쟁하게 된다. 피로하고 괴로운 삶을 피할 수 없다. 정의가 되기 위해 불의를 창조하지 말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낙오자를 창조하지 말자. 선생이 되기 위해 무지한 자를 창조하지 말자. 옳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를 창조하지 말자. 옳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기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자. 승자가 되지 말고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쟁취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온전한 사람이 되자. 빼앗는 사람이 되지 말고 풍요속에 있는 사람이 되자. 


춤의 차원에서는 의도를 가지고 알아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이 아닌 춤으로 바라보기로 결심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소망을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알아채기로 결심한다.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춤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대상이 예쁘고 못생기고를 판단하기 전에 열쇠와 자물쇠로써 온전함에 주목한다. 지금 여기에 함께 있음이 기적임을 다시 떠올린다. 이 순간과 조화를 이루는데 어떤 춤이 도움이 될지에 초점을 맞춘다. 대부분의 봉사와 친절은 춤에 가장 가깝다. ‘내 앞에 있는 대상에게 어떻게 봉사하고 친절을 베풀까?’라는 질문의 답은 춤에 가장 가깝다. 나를 희생해서 다른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꺼이 나의 시간과 나의 재능으로 잠깐 베푸는 친절은 이 순간을 조화롭게 한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게 한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물 반잔의 비유처럼 현재 나를 도와주는 부분, 내가 이미 받은 축복을 알아차리고 감사한다. 그 과정을 끊임없이 실천한다면 집착은 사라지고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지게된다. 이 순간에 100% 만족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천사들이 보이게 된다. 
여행을 하는 중에 여러 장애물을 만날 수 있다.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여행을 시도한 것이 잘못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꽃피우는 삶에도 여러 장애물이 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장애물을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하다. 장애가 생기는 이유는 작은 자아가 천성적으로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 藝 Art>편 '내가 아는 가게'에서 자주 만나는 장애물을 비유로 나타내었다. 

하지만, 그 가게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게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뭐가 불안한지 슬프고 어두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결국 가게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가게에 들어온 어떤 사람은 웨이터에게 무례하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간절하게 음식을 달라고 사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웨이터는 아무것도 못 들은 듯이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냅킨에 그림을 그리지만, 이내 다른 그림을 그리고 또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냅킨이 너무 부드럽고 얇아서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 역시 음식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한 여성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들어와 냅킨도 건네고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웨이터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웨이터가 데리고 온 사람은 발을 저는 작은 사내였습니다. 그 여성은 망설이며 웨이터와 그 작은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면서 식당을 나갔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가게의 주문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방법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이 나오지 않자 너무나 화가 났는지 메뉴판과 테이블로 음식을 만드려고 했습니다. 메뉴판을 가위로 오리고 테이블을 톱으로 자르고 있었습니다. “겨우 성공을 해서 음식 모양이 나오더라고 그건 음식이 아니잖아요!” 하고 나는 소리쳤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한 남자는 음식을 주문을 해 놓고도 음식이 나오지 않을까 봐 테이블 위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춤도 추지 않고 식당에서 나오는 텔레비전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잠깐 주위를 돌아보다가 내 자리에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왔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가게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배가 고플 때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이 힘들 때 삶에게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나 자신이 밉고 초라하고 못마땅할 때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이들이 가게 안에 들어서지 못한 이유이다. 삶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삶에게 감사하고 있는가? 혹은 원망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혹은 통제하려고 하는가?”
이는 삶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또 다른 악순환이다. 그저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기만 하자. 내 안의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답게 힘들 때 감사하기 싫어한다. 자신을 사랑하기 힘들어한다. 부드럽게 알아채기만 하자. 알아채고 부드럽게 바라만 보아도 이미 초점은 이동하고 안경을 쓴 상태가 된다. 삶을 원망하는 것에서 감사로 마음을 돌리는 순간,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대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밝혀져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어느새 가게 안에 들어선다.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이유는 노래의 차원이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작은 자아가 이야기를 계속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노래를 부르기 어렵게 한다. 이 순간에 반응하게 한다. 반응이라 함은 분노하거나 두려워하게 한다는 뜻이다. 싸우거나 도망가게 한다. 자신 안에 있는 아이를 알아챔은 다시 노래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가게 안에 들어서면 웨이터에게 주문이 담긴 냅킨을 건네야 한다.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웨이터와 냅킨을 볼 수 없다. 따로 시간을 내어 가능성의 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신중하게 선택하여 매일 같은 그림을 그린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불행해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항상 같은 그림을 생생하게 그린다면 웨이터는 나의 진정성을 알아차린다. 주문이 되었다. 
춤추는 차원에서 춤을 추지 않고 그림으로 보게 된다면 마음은 판단하게 된다. 그림으로 보기 시작하면 저항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마음은 여러가지 판단을 하겠지만, 공통된 생각은 ‘이 순간은 잘못되었다. 부족하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밑받침으로 우리가 택하는 태도는 세 가지이다.
첫째, 통제하려고 한다. 분노와 관련되어 있고 싸우려는 태도이다. 어떻게 하든 원하는 그림으로 꾸미려한다. 가게 안에서 테이블을 톱질하고 메뉴판을 가위질하는 사람을 보면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씨앗이 싹트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씨앗을 으깨어 버무려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려는 모습과도 같다. 이 또한 어리석은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한다. 이 순간은 거대한 가게이고 큰 씨앗이기도 하다. 이 순간이 싹트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 순간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 순간을 원하는 모습으로 꾸미려 한다. 테이블을 톱질하고 메뉴판을 가위질하는 사람은 분명히 어리석어 보인다. 씨앗을 으깨어 버무려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려는 모습도 확실히 현명하지 않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꽃을 만드는 삶 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늘 꾸미는 삶만을 살았다면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는 삶이 있음을 모른다. 따라서 꽃피우는 삶이 있음을 아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꽃피우는 삶이 있음을 안다고 하여도 그러한 삶이 작동하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예전과 같은 꽃을 만드는 삶을 살게 된다. 의식적으로 꽃피우는 삶을 살아보아야 한다. 연습이 필요하다.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춤을 추었을 때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여러 번 경험한다면 꽃피우는 삶을 진정으로 믿게 된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는 상태로 접어들 수 있다.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야기 속에 휩쓸려 버리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안경을 벗긴다. 초점은 다시 이전과 같이 흐릿해지고 눈앞에 대상은 싸워야 하는 적이거나 이용해야 할 사람이거나 피해야 하는 괴물이다. 이야기에 대해 깨어 있어야 이야기를 벗어날 수 있고 초점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두려워한다. 두려움으로 얼어버린다. 천사가 춤을 청하러 왔지만, 천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버림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으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다. 음식을 주문해 놓고도 음식이 나오지 않을까 봐 테이블 위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사람과 같다. 타조가 머리를 땅에 묻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러한 상태를 피하려면 내면에서 항상 감사와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와야 한다. 감사와 사랑은 두려움을 녹여버린다. 
셋째, 무시하려고 한다. 문제가 없는 척한다. 어떤 행동을 하지만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예 다른 행동을 한다. 식당에서 나오는 텔레비전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 사람과 같다. 나는 다 내려놓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푸념한다. 내려놓았다는 것은 텔레비전을 보며 즐거워했다는 것이 아니다. 웨이터가 데려온 천사를 알아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했다는 뜻이다. 즉, 삶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삶을 바로 보면서 그림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꽃피우는 사람에게서 가장 어려운 도전일 수 있다. 삶이 어렵지 않을 때부터 이 순간을 춤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히 새롭고 완벽하고 온전한 순간임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자체가 명상이다. 눈을 뜨고 하는 명상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이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명상을 하면 안 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도를 품고 명상을 한다면 명상이 아니라 또 다른 꽃을 만드는 삶이다. 그 미묘한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첫 마음이 중요하다. 초심자의 마음이란 무지한 마음이 아니라, 첫 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다. 
안경을 쓰고 초점을 유지하는 일이 처음에는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처음 여행 가는 곳에서는 지도를 들고 가야 하며 골목마다 지도를 펼치고 영토와 지도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영토와 머릿속의 지도를 일일이 대응하며 골똘하게 생각한다. 이 과정이 버거워서 지도를 치워버리고 아무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 처음 배우는 자전거처럼 어색하고 힘들 수 있다. 실패하고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여행 간 곳에 집을 짓고 한 달 두 달 살게 되면 지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미 머릿속 지도는 영토가 되었다. 꽃을 피우는 삶을 살기로 온 마음으로 한 달 두 달 살아간다면 노래와 그림과 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된다. 자연스러운 삶이 된다. 항상 안경을 쓰게 된다. 어렵게 배운 자전거는 익숙해지고 어떤 어색함도 없고 자연스럽다. 처음에는 자전거 타기가 스트레스였으나 이제는 자전거 타기는 휴식이다.  꽃피우는 삶도 같다.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왜곡된 렌즈를 본래의 렌즈로 바꾸는 방법은 감사와 사랑이다. 감사와 사랑은 얼마나 심오한가! 감사한다는 것은 대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신의 선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 자체가 신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은 없으며 이 세상은 오로지 물리적인 인과율만이 적용되는 곳이라면 감사할 일은 없다. 일이 잘 되면 오로지 자신이 잘해서 잘 된 것이다. 일이 잘 안되면 자신을 비난하거나, 세상을 비난할 뿐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감사할 대상이 있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나 혼자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고 있는 어떤 존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선언이다. 겸손함은 이 일이 나 혼자 한 일이 아님을 알 때 생기는 감정이다. 성공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해진다. 자신감은 하늘이 항상 나를 돕는다는 것을 알 때 생기는 감정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앞날이 어두워 보여도 내가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한다면,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춤을 춘다면 하늘이 돕는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겸손함과 자신감은 항상 함께 다닌다. 감사를 하는 행위 안에 겸손함과 자신감이 숨어 있다. 감사는 그 무엇보다 신이 곁에 있음을 인정하는 선택이다. 감사 안에 이 모든 의미가 녹아 있다.   
자신을 사랑함은 또 얼마나 심오한가! 자신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인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더 큰 존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때마다 자신은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가 된다.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 상태를 상승시킨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이 몸이 전부가 아니며, 나의 직업이 전부가 아니며 나는 이들보다 더 큰 무엇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 큰 자아가 되었다. 큰 자아 안에는 나도 있고 내 앞에 있는 그녀도 있다. 따라서 내가 작든 자아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지만,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 큰 자아가 된 후에는 그녀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함에 이 모든 의미가 스며 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잠시 멈추고 자신을 살피자. “나는 지금 혹시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 척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해 보자.’ 그리고 이 문제와 가장 관련이 깊은 감정 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 안에 아이가 보인다면 그 아이를 ‘사랑해 보자.’ 이유를 떠나서 ‘많이 놀랐겠구나.’라고 말해주자.”결과는 염려하지 말고 이렇게 해보자. ‘감사해 보자, 들어가 보자, 사랑해 보자’를 강조한 것은 이를 의무감으로 혹은 기대를 가지고 하기 보다 마음을 비우고 무심하게 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꽃피우는 삶이라는 새로운 삶에 들어선 것을 환영한다. 이 책이 지도와 안경이 되었으면 한다. 
가장 바라는 것은 입맞춤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입맞춤이 될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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