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기는 축복하는 것이다.
축복이란 욕구가 이루어지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축복은 사랑의 하나이다.
그림 그리기는 현존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현존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차원은 노래, 그림, 춤 가운데 가장 빠르게 진동하는 차원이다. 천천히 진동하는 물질계와 다르게 매우 빠르게 진동하고 있다. 빠르게 진동하는 가능성의 장과 하나가 되어 그 차원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린다. 무의식적으로 그리는지, 의식적으로 그리는지가 다를 뿐이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이미 여러 그림들을 그렸다. 반복된 그림은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다. 각인된 그림은 믿음이 된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림은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활력이 넘치며 모든 기능이 훌륭하고 어떤 병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는 몸에 대한 그림을 간직한다. 그 사람은 실제로도 건강하며 피로가 잘 회복되고 감기에 잘 걸리지 않으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다. 병에 걸려도 결국은 회복한다. 어떤 사람은 주변에서 들어본 여러 병들이 자신을 찾아올까 두려워한다. 약하고 무기력한 몸에 대한 심상을 간직한다. 실제로도 여러 질환에 취약하며 생기가 없다. 이러한 심상은 건강뿐 아니라 풍요, 관계, 직업 면에서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삶의 전분야에서 자신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 과정과 같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또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과 같다. 목적지는 지금 위치한 곳과 당연히 다른 곳이다. 위치도 다르고 풍경도 다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내비게이션에 가고 싶은 곳을 입력하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 있는 곳과 비슷한 장소를 입력하곤 한다. 가난한 현실이 싫지만, 지금 가난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가난할 것이라 생각한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비게이션에 어떤 곳이라도 입력만 한다면 원하는 어떤 곳에든 데려다줄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에도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주소를 입력하겠는가? 삶이라는 자동차에는 내비게이션보다 더 정교한 장치가 있다. 바로 잠재의식이다. 가능성의 장이기도 하다. 가능성의 장은 자신만의 화실이다. 화실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만일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되고 싶은 자신,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에 대해 그림을 그려 넣어 둘 수 있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온갖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 그림을 그려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 일들을 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책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치병에서 회복되고 가난한 이에서 부자가 되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계층의 사람이 되었던 수많은 예들이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종이에 목표를 적는 것, 비전보드에 이루고 싶은 목표에 관한 사진을 붙히는 것도 잠재의식에 그림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이다.
그들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그림을 그릴 때는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밝은 면인 욕구를 알아차리고 상징을 정한다.
둘째, 가능성의 장에 들어간다.
셋째, 가능성의 장 안에서 상징에 관한 그림을 놓아둔다.
가능성의 장이란 무엇인가?
가능성의 장은 양자 수프,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 텅 비어 보이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갖추어져 있는 공간이다. 빈 공간처럼 보이지만 비어있지 않다. 매우 빠르게 진동하는 에너지들로 채어져 있다. 이곳에 도달하여 상상한 그림들은 이루어질 확률이 매우 높다.
가능성의 장에 어떻게 도달할까? 신, 큰 자아 혹은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감사를 하면 작은 자아는 현존과 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면 자신은 열쇠가 되어 아귀가 딱 맞아서 투명해진다. 이 과정은 노래를 부르는 과정과 같다. 다만, 그 과정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을 온 마음으로 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과 나의 몸을 벗어난다. 감사를 진심으로 하고 감사의 에너지에 흠뻑 젖은 후 미간 사이를 바라보는 명상법이 도움이 된다. 뇌파는 알파파에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간다. 세타파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자신을 잊게 되는 그때, 가능성의 장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만의 화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곳에서 상징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노래하는 상태에서 가능성의 장을 알아차리고 높은 에너지를 선택하여 가능성의 장과 같은 진동수로 진동한다. 그 과정을 통해 가능성의 장과 하나가 된 후 의식적으로 상징을 선택하고 소망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의 고양된 느낌을 미리 느껴야 한다.
중략 -------------------------------
인디언의 기도에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한다. 자신을 비워야 한다. 명상의 상태와 같다. 명상의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면 실패한다. 마음에 고요함이 일어나야 한다. 뇌와 심장이 일관되어야 한다. 뇌파를 낮추기 위해 도움이 되는 방법은 공간에 의식을 두는 것이다. 인디언이 눈을 감고 신성한 돌의 주변을 돌기 위해서는 공간에 의식을 두어야 한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주변 공간을 바라보고 걷는 동안 명상의 상태에 도달했다. 공간을 본다는 것은 물체와 물체 그리고 그 사이도 본다는 의미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본다는 의미이다. 이때 뇌는 이 순간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분석하지 못한다. 침묵한다. 사실 '신'을 알아차린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 혹은 전체를 의식하면 뇌파는 느려져 알파파가 흘러나온다. 제각각의 노래를 부르다가 한 목소리를 내는 합창단과 같다. 그 합창단에게 신과 같은 진동수의 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은 감사이다. 인디언은 '현재의 모든 것에,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것'에 감사를 했다. 심지어 '가뭄에게도' 감사를 했다. 문젯거리에게 감사를 하면 문젯거리에 엉겨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상쇄된다. 마음을 청소할 수 있고 마음을 비울 수 있다. 감사는 정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슴을 여는 더 훌륭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현재의 알고 있는 모든 것, 기억하는 과거의 모든 것을 그냥 기억하는 것과 '감사'를 더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어떤 대상에 '감사'를 더하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달라진다. 그 대상의 부정성은 상쇄되고 최상의, 최선의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현재와 과거에 대한 집착은 녹아내리고 장애물처럼 보였던 부분은 텅 비게 된다. 이 상태에서 상상을 하면 가슴과 머리는 연결된다. 머리와 가슴이 연결되면 비로소 잠재의식은 눈을 뜨고 우리가 그리는 그림을 받아들인다. 그림은 생생하게 그려야 하며 오감으로 느껴야 한다. 인디언이 비가 내리는 그림을 그릴 때 비가 몸은 적시는 느낌(촉각), 비가 내릴 때의 비릿한 냄새(후각), 가슴께까지 자란 옥수수(시각)처럼 여러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느끼면 어느 순간 내가 그린 그림이 실현되었다는 '자각'이 생긴다. 이 '자각'은 고양된 느낌을 동반하는데 뭐라 표현할 수가 없을 짜릿함과 황홀함이다. 이러한 고양된 느낌까지 도달하면 그림은 나만의 화실에 걸린다. 음식점에서 주문은 되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새로운 목적지가 입력되었다. 그 후에는 그 그림이 이루어지도록 온갖 동시성이 일어난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인간적이고 솔직해야 한다. 화실에 걸어두는 상징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사회가 정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 자신만의 상징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욕구를 알아차리고 상징화를 하면 소망이 된다. 욕구는 원석과 같아서 그 가치를 모르고 내면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 놓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잊히거나 억누르거나 무시할 수는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욕구와 일치되는 일을 할 때는 가슴은 두근거리고 자신은 사라지고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알게 되고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우연으로 치부하거나 마음의 재잘거림을 듣는다. '그 일 하느라 중요한 업무를 못했잖아.' 이 욕구를 소중하게 대하면 우리는 지름길을 찾게 된다. 아픈 사람들이 낫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욕구일 것이다. 이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상징을 정한다. 그 상징은 의사일 수도 있고 간호사일 수도 있다. 다른 이가 몰랐던 치료법을 찾아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징을 정해서 화실에 걸어두면 욕구는 소망이 된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자신의 소망을 찾아낼 수도 있다. 성공한 사람을 보았을 때 질투심이 난다면 자신도 성공하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감정을 더 깊게 들여다보면 성공하고 싶은 소망의 이면에는 성공하여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변호사가 된 사람이 부럽다면 변호사가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소망일 수도 있으며 변호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받는 것이 소망일 수도 있다. 어떤 감정을 느껴도 그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그 감정에 감사를 전하고 그 감정을 살펴 볼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야 그 감정은 자신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되는 척할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면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있다. 부자인 척을 하고 강한 척을 한다면 풍요롭고 강한 자신을 생생하게 상상하고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면 부자인 척, 강한 척을 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 반대를 그리면 된다. 외로워질 까 봐 두렵다면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해하는 자신을 그릴 수 있다. 시험에 떨어질 것이 두렵다면 시험에 합격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소망을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면 소망이 점점 더 변하는 경우가 흔하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는 소망에서 더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는 일에 가슴이 설렐 수 있다. 욕구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자라고 변한다. 그 욕구를 살펴보다 보면 욕구를 소망으로 변모시키는 일을 평생에 걸쳐 하게 된다. 그 소망은 하늘의 별이 되어 어두운 밤에도 굳건하게 반짝인다. 그 별에 맞추어 삶의 흐름이 바뀐다.
자신의 소망 중에 소망,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설레고 고양되는 감정을 느낀다면 당신의 소명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소명을 알게 되면 현실의 어려움은 작게 느껴진다. 매일매일 생기에 찰 것이다.
일기를 쓰면 자신의 소망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오늘 가장 기분 나빴던 일을 한 가지 적고 오늘 가장 기분 좋았던 일을 한가지 적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는다. 기분 나빴던 그 당시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봐 두렵고 화났을까? 내 존재가 초라해 보여서 혹은, 내가 옳지 않은 사람으로 보여서, 내가 희생자처럼 보여서 등 여러 가지 답이 나올 것이다. 그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자.
“네가 실패하고 약해지고 아프고 틀려도 나는 널 사랑한다. “
이 말은 강력하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자. 마음은 그 말이 틀렸다고 계속 논쟁을 걸어 올 것이다. 온갖 증거들을 가지고 올 것이다.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도 계속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자. 그 말이 더 근원적인 치유책이다. 마음은 잠잠해질 것이다. 불안해지고 두렵고 화날 때마다 그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알아채고 인정해 주고 자신에게 이야기 주자.
“나는 널 사랑한다. 어떤 경우에도 널 사랑한다.”
기분 좋았을 때를 떠 올리며 자신에게 묻는다. 그 일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될 때 기분이 고양될 수 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표현할 힘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거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뿌듯했을 수 있다. 어떤 일을 해 내는 데 필요한 사람을 만나거나, 정보를 알게 되거나, 작은 성공을 했을 때 설레었을 수 있다. 혹은 훌륭한 의사, 소방관, 과학자의 삶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을 수 있다. 그 길이 당신의 소명일 수 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았다면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하나의 의식처럼 진지하고 진실하게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감사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것을 현존한다는 것이고 신을 의식하는 것이고 뇌를 일관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러 명상법이 있지만 공간을 의식하는 것, 침묵을 의식하는 방법이 강력하다. 인디언이 기도를 할 때 눈을 감고 신성한 원을 돈다는 것은 공간을 의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해도 좋고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거나 머리 위쪽을 마음으로 바라보아도 된다.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속 공간을 의식해도 된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감사를 선택한다.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린다.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에게도 감사한다. 문제에게 이 역할을 해주어 감사하다고 전하자.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하자. 알아차림과 감사로 마음이 고요해지면 응시하는 그 공간이 바로 가능성의 장이다. 자신만의 화실이 보인 것이다. 이 화실에 새로운 자신을 선택한다. 자신이 결정한 상징을 지닌 새로운 자신을 생생하게 선택한다. 새로운 자신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다면 고양된 감정이 흘러나온다. 황홀하고 짜릿한 느낌이 생긴다.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게되어 마음이 차분해 지기도 한다. 이제 화실에 그림이 걸렸다. 그 감정을 일부러 일어나게 할 수 없다. 저절로 우러나게 해야 한다.
그림의 차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새롭게 창조한다.
숨어 있는 말을 포함해서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삶의 주인인) 나는 (이 순간 삶이 어려워 보이고 나 자신이 부족해 보이지만, 삶에 감사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지금 (내가 소망하는 상징들을 누리고 있는 자신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림이 화실에 걸렸다면 그 그림을 보고 신이 당신에게 춤을 청하러 올 것이다.
춤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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